11회 국제여성영화제, 오버 더 레즈보우

국제여성영화제 (위의 이미지는 여성의 다중성을 상징하는 특이한 포스터이다.)
출처 :국제여성영화제 홈페이지

Over the Lezbow

11회 국제여성영화제의 막이 올랐다. 여러분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룸메이트가 이야기 했다. 친구의 어머니가 실직을 하셨다고 한다. 친구와 어머니. 단둘 뿐이었다. 그들의 생계가 막막해졌다.

미디어에서는 외쳐댄다. 외시, 행시, 각종 국가고시 합격자 중 여성이 50% 이상을 차지했다는 종류의 기사들. 경제가 어려워지면 가장 먼저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이 여성이다. 또한 아직까지도 대다수의 여성들은 비정규직에 몸담고 있다. 그리고 맨 먼저 잘리게 되는 위치가 비정규직인 여성들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더욱 처절하게 공부해야만 하는 것이다.
단지. 살기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여성들이 보는 시선은 어떠할까.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시대에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는 여성들. 게다가 성적 소수자인 ‘레즈비언’으로써의 그들의 팍팍한 삶.

오버 더 레즈보우 섹션의 ‘사람들은 내 바지를 벗기려 한다'(Trousers or a skirt, 한국, 남효주 감독)의 제목을 가진 단편영화가 있다. 성적 구별이 확연이 이루어지는 공중화장실. 외형적으로 성적 정체성이 불분명한 주인공에게 지나가는 행인들은 불편한 기색을 역력하게 드러낸다. 주인공은 가르킨다. 치마를 입은 픽토그램을.
“이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 긴 머리는 여자. 짦은 머리는 남자. 바지는 남자의 것. 치마는 여자의 것. 이 것은 사회가 구분지어놓은 것일 뿐. 언제나 타당한 것이 아니잖은가.”
어떤 면에서 사회는 여성에게 끊임 없이 여성성을 내던질 것을 권유한다. 어떤 면에서는 여성성을 갖춰주기를 원한다. 여성다운 남성은 혐오의 대상이지만, 남성다운 여성은 리더쉽을 갖췄다고 표현한다.

게다가 여성들은 서로 性에 동질감을 느끼지 못한다. ‘불을 꺼주세요(spinning, 노르웨이, 헤이디 아르네센 감독)’에서 볼 수 있듯이, 몸으로 대변되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갖추기 위해서 여성들은 서로를 끊임 없이 경쟁자로 인식하고 있다. 불이 꺼지고 외형적인 조건이 더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할 때에야 비로소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길의 끝에서(at the end of the street, 스페인, 필라 구이티에레스 아구아도 감독)’에서 여자 주인공은 여자친구에게 실연을 당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를 위로하게 되는 존재는 남성이다. 동성애란 어떤 특정한 性에 대한 끌림이 아니다.

기독교적인 윤리로 보았을 때, 분명 여성과 여성의 사랑이 죄악이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체리 레드(cherry red, 독일, 레나 크나우스 감독)’에서처럼 동성애와 이성애는 커다란 장벽을 가진 N극과 S극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사랑에도 신의가 있으며, 동성애와 같은 애절함이 뭍어나온다.

레즈비언이란 여자끼리 서로 육체적으로 탐닉하거나 사랑하는 역겨운 동성애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 단편 영화들을 보고 나면 그러한 생각의 전환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동성애란 미묘한 감정선의 차이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 영화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다음은 감각적인 11회 서울 국제여성영화제의 공식 트레일러이다.

여성영화제의 역사를 간략하게 ‘사진’이라는 형식으로 꾸며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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